‘적군의 언어’가 왜 미술관을 통째로 바꾼 전시였나요?

얼마 전 SNS에서 폐허가 된 미술관 사진을 봤는데, 처음엔 영화 세트장 홍보컷인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렸던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전시였죠. 2026년 9월 기준으로 관람은 이미 종료됐지만, 왜 그때 미술계와 콘텐츠 덕후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는지는 아직 곱씹을 만합니다.
전시였는데, 거의 세계관 입장이었다
《적군의 언어》는 아르헨티나·페루계 작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한국 첫 개인전으로, 2025년 9월 3일부터 2026년 2월 1일까지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렸습니다. 아트선재센터 공식 소개 기준으로 이 전시는 단순히 작품을 벽에 거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건물 전체를 하나의 조각적 생태계처럼 바꿔버린 장소 특정적 프로젝트였습니다.
실제로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전시장뿐 아니라 복도, 계단, 화장실, 시네마 공간까지 전시의 일부가 됐습니다. 1층 주출입구는 흙더미로 막혔고, 흰 가벽과 조명은 걷어냈으며, 벽과 기둥은 속살이 드러난 상태로 노출됐습니다. 흙, 불, 식물 같은 요소가 내부로 들어오면서 미술관 특유의 깨끗하고 안전한 느낌이 확 흔들렸습니다.
왜 ‘적군의 언어’라는 제목이 붙었을까?
제목만 보면 전쟁물이나 정치 다큐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작가가 말한 ‘적군’은 총을 든 상대라기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완전한 타자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혼자 언어와 상징을 만든 존재가 아니라,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같은 다른 인류와 부딪히고 섞이며 의미를 만들어왔다는 관점이 깔려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이 이야기가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작가는 지금의 인간이 다시 새로운 타자와 마주하고 있다고 봅니다. 바로 AI 같은 합성 지성입니다. 우리가 AI에게 지식을 넘기고, 동시에 그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그래서 이 전시는 ‘무섭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떤 존재로 다시 보게 되는지 묻는 쪽에 가깝습니다.
입소문 난 이유는 비주얼만이 아니었다
세계일보와 헤이팝 등 당시 현장 보도에서도 공통으로 언급된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전시는 사진 한 장만 봐도 강했습니다. 모래와 흙, 노출된 콘크리트, 비닐로 덮인 좌석, 거꾸로 매달린 식물, 기계와 자연물이 뒤섞인 조각들. 말 그대로 ‘미술관에 멸망 이후의 시간이 들어왔다’는 반응이 나올 만했습니다.
그런데 비주얼보다 더 센 건 제작 방식이었습니다. 작가와 오랜 협업자 11명이 아르헨티나에서 서울로 와서 약 6주 동안 현장에서 전시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작가가 개발한 ‘타임 엔진’이라는 디지털 시뮬레이션 도구도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비디오 게임 엔진, AI, 가상 세계 기술을 섞어 만든 이미지를 현실의 금속, 콘크리트, 플라스틱, 흙, 유리, 수지, 소금, 나무껍질, 자동차 부품 같은 재료로 다시 구현하는 방식입니다.
- 확인된 전시 기간은 2025년 9월 3일부터 2026년 2월 1일까지입니다.
- 아트선재센터 공식 분류상 현재는 과거 전시입니다.
- 작가의 한국 관련 이력에는 리얼 DMZ 프로젝트,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광주비엔날레 참여가 포함됩니다.
- 관람객 증가로 사전 예약 안내와 야간 개장 공지가 별도로 나왔던 것도 확인됩니다.
루머처럼 보였지만, 확인된 사실은 꽤 과감했다
이 전시를 두고 ‘미술관을 진짜 폐허로 만들었다’거나 ‘AI가 전부 만든 전시다’ 같은 식의 말이 섞여 돌기 쉬웠습니다. 다만 확인된 범위에서 말하면, 건물 전체를 전시 장치로 적극 활용한 것은 맞지만 무작정 훼손한 이벤트가 아니라 기획된 장소 특정 설치였습니다. AI 역시 전시의 상상과 제작 과정에 연결된 중요한 요소였지만, 인간 협업자들의 현장 제작과 물질 작업이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적군의 언어》는 ‘인스타에서 핫했던 전시’ 정도로만 보기엔 아깝습니다. K-콘텐츠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봐도 재미있는 지점이 분명합니다. 요즘 드라마, 영화, 예능까지 다 세계관과 몰입감을 중요하게 보는데, 이 전시는 미술관이라는 현실 공간을 아예 세계관 안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관객은 작품 앞에 서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무너졌거나 아직 자라고 있는 세계 안을 통과하는 사람이 됐고요.
지금 다시 말 나오는 이유
전시는 끝났지만 사진과 후기는 계속 돌아다닙니다. 특히 AI, 포스트휴먼, 멸망 이후의 세계 같은 키워드가 2026년에도 콘텐츠 업계 전반에서 뜨겁다 보니, 《적군의 언어》가 던진 질문이 늦게 따라붙는 느낌도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전시는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친절한 캡션보다 감각적인 압도가 먼저 오니까요. 그래도 그 불편함 때문에 오래 남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적군의 언어》는 딱 그쪽에 가까웠습니다. 예쁜 전시보다 이상한 전시가 더 오래 기억나는 순간, 그게 이 작품의 힘이었을지도 모릅니다.
